[출제자는 우리에게 ‘제시문→선택지’의 순서를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문항은 질문→제시문→선택지의 순서로 쓰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반드시 문항을 질문→제시문→선택지의 순서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질문은 항상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시문부터 곧바로 읽을 경우 대체로 낯선 소재일 가능성이 높은 제시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면서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이해가 여의치 않을 경우 두려움이 커져서 결국 페이스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문제의식을 꼭 한 번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시문이 총 10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 선택지를 판단할 때 그 10개의 문장이 모두 사용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즉, 쉽게 말해서 무엇을 근거로 선택지를 물어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시문의 모든 문장을 꼼꼼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접근은 효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선택지부터 꼼꼼하게 읽어보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제시문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선택지를 “가볍게 관찰”하는 정도의 시도를 해본다면, 이는 제시문 읽기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 잡아줄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지 관찰은 시각적이고 외형적인 관찰을 통한 전략수립을 의미합니다.]

선택지 관찰은 정말 가벼운 정도의 시각적이고도 외형적인 관찰을 통한 전략수립을 의미합니다. 주로 <보기>형 선택지에서 조금 더 수월할 수 있는데, ㄱ~ㄷ까지 3개 선택지의 앞, 중간, 끝의 공통점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2024-01

이 경우 ㄱ, ㄴ은 A와 B를 각각 따로 묻고 있고, ㄷ은 A와 B를 함께 묻고 있습니다. 이 때 제시문-선택지 간 연결성을 높이기 위해 A를 읽고 ㄱ 해결, B를 읽고 ㄴ 해결, 이후 ㄷ 해결과 같은 순서를 구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선택지를 먼저 관찰하지 않았다면, A와 B를 모두 읽고 ㄱ을 해결하기 시작할 텐데, 이 경우 B에 앞서서 읽은 A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 A의 내용을 다시 파악하는데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것입니다.

2) 2024-02

이 문항의 경우, 제시문이 <원칙>, [규정], <사례> 순으로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때 선택지를 먼저 관찰하지 않는다면, 선택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저기 전반적으로 힘을 잔뜩 쓸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선택지 관찰을 먼저 해보면, 내가 해야할 일이 “갑에게 명예퇴직수당이 지급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고, 그것이 제시문의 ㉠, ㉡, ㉢ 각각에 따를 때 그러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시문을 읽을 때도 ㉠, ㉡, ㉢을 상호 유기적으로 살피지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살펴봐도 무방함을 미리 알 수 있고, 나머지 부분들을 읽을 때도 일단 갑에게 명예퇴직수당이 지급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을 정렬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2020-01

이 문항은 제시문 읽기에 앞선 선택지 관찰의 필요성을 크게 보여주는 문항입니다. 일단 ㄱ, ㄴ은 모두 A와 C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즉, B에 대해서는 묻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시문에서는 A, B, C의 순서로 등장하겠지만, 선택지 관찰을 먼저 한 사람은 A와 C를 유기적으로 더욱 비교하겠다는 목표를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선택지의 길이를 한 번 봅시다. 시각적으로, 외형적으로 볼 때 ㄷ 선택지는 나머지 두 선택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짧습니다. 추리논증 기출문항들을 보다보면, 이렇게 압도적으로 짧은 선택지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이러한 선택지들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또한, B는 ㄷ 선택지 하나를 위해 제시문에 등장하는 친구입니다. 게다가 ㄷ은 무엇을 물어보는지 짧고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문을 읽기 전에 순간적으로 세워볼 수 있습니다.

‘일단, A, B, C를 읽으면서 “갑이 처벌받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지 여부”에 1차적으로 초점을 맞춰봐야겠다. 그렇게 해서 ㄷ 선택지 판단을 먼저 한 다음, ㄱ 선택지와 ㄴ 선택지를 보면서 A와 C를 조금 더 들여다봐야겠다.’

제가 이걸 글로 적어서 그렇지, 머릿속으로 이 정도 생각을 하는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지 관찰을 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수험생은 A, B, C의 순서대로 제시문을 읽은 다음 ㄱ 선택지를 먼저 판단할 때 A와 C 사이를 끊어놓은 B 때문에 다시 한 번 A와 C를 들여다봐야 할 확률이 높고, ㄴ 선택지까지 다 판단하고 나면 B는 이미 머릿속에 없을 것인데 ㄷ 선택지 때문에 다시 B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읽기가 매우 빠르지도 않고, 기억력이 매우 좋지도 않습니다.]

만약 빠른 시간 안에 제시문을 모두 읽어내고, 그 내용이 ㄷ 선택지를 해결할 때까지 머릿속에 온전히 다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모양 빠지게 선택지 관찰을 먼저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제시문을 읽다보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앞서 읽었던 내용이 서서히 날아가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매우 빠르게 읽는다고 해도 선택지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이미 상당부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선택지 관찰은 반드시 한 번 해볼 만 한 시도입니다. 나는 인생을 태어나면서부터 워낙 바르게 살아와서, 무엇이든 주어진 순서대로만 읽는다고 한다면 제가 드릴 말씀은 크게 없습니다. 그러나 출제자가 1번부터 40번까지 순서대로 풀라고 지시하지 않은 것처럼, 출제자는 역시 절대 선택지부터 보지 말고 제시문부터 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출제자가 무엇을 물어보는지를 선택지 관찰을 통해 가볍게 빨리 한번 파악한 다음 제시문을 읽는 것은 정말로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간 저는 수업에서 항상 선택지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수업 때 수강생들과 함께 항상 선택지 관찰을 연습해 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정확도와 속도 면에서 진보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저 아무런 대책 없이 열심히만 하면 어느 날 제시문 읽기도 빨라지고 선택지 판단도 정확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격한 변화는 항상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옵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시도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지 관찰을 통해 출제자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먼저 살짝 엿보는 시도, 그러한 작은 시도가 큰 변화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